나 같은 철학 문외한에게 <슬픈
열대>의 장점은,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명한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의 이 유명한 저서는 철학적 깊이가 깊다고 해서 어려워야 한다는 선입견을
살짝 뛰어 넘는다. (대체로 푸코는 혼란스럽고, 라깡은 쉬운 말도 어렵게 하고, 롤랑 바르뜨는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이해불가.) 기행문 형식의 <슬픈 열대>는 그가
유람하는 뱃길과 그가 관찰한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둘러보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더구나 <문명화된> 사회를 자세히 해부해 보면, 이 원주민들의 풍습이 가지고 있는 인류학적 의미들과 동일한 부분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 스트로스의 주장이다. 모든 사회는 다를 수는 있어도,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들만의 기준>이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있는 면죄부는 아니지만, 한 번쯤 깊게 생각해 볼 문제이기는 하다. 스트로스는 염세주의적 종교관을 일종의 해답으로
제시한다. 천국이나 지옥 같은 내세는 없으며, 모든 것이
無로 환원되는 불교를 해결책의 예로 들고 있다. 어떤 하나의 가치를 내세우는 종교나 사회보다는 개인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치를 설명할 수 있는 형이상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현세는 종교가 사회, 경제를
잠식하고, 사회와 경제가 인간성을 속박하는 상태이다. 사회적으로는
불교가 제시하는 형이상학을, 경제적으로는 마르크시즘을 통해서 이러한 인간성 상실을 극복해야 한다는 궁극적인
가치관을 제시한다. 나는 그의 견해를 부분적으로 수긍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이상주의적인 소박함에 매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문명이 가지고 있는 교만을 꾸짖을 수는 있겠지만, 그 업적을 폄하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문명은 과연 더 우월함을 의미하는가?
<발달된 서구 문명>이 지니는 가치는 브라질 오지의 원주민들이 가지는 가치보다
더 큰 것일까?
스트로스는 문명화된 사람들이 역겨워 마다 않는 식인 풍습을 비롯하여, 갖가지 <야만스러워 보이는> 원주민들의 풍습들이 사실은 얼마나
정교하고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지를 매우 자세한 관찰과 사유로 설명한다. <야만스런> 브라질의 부족들도 그들에 걸맞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사회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문명화된>인간이
정해둔 가치관이나 행복을 똑 같은 기준으로 그들에게 들이댈 수는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