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이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구별 못하던 소싯적, <뽕네프의 연인들>이란 영화를 보고 그 강렬한 이미지와 점프 컷, 함축과 생략의 아름다움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다. 그 후 이 감독, 레오 까라가 언젠가는 대단한 영화를 만들고야 말 것이라는 기대 속에 살아온 것이 벌써 어언 30년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그의 작품에서 느꼈던, 뭔가 2% 부족했던 느낌은 <홀리 모터스>가 세상이 나옴으로써 넘쳐나온 강물이 논밭을 쓸어가버리듯 깨끗이 정리된 기분이다.
레오 까라가 한국에 와서 영화 상영 후 관객들과의 대화를 했는데, 한 관객이 이 영화가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어찌 천재와 범인의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감독의 답변이 폐부를 찌른다. <그것은 당신이 느끼는 몫이다.>
<홀리 모터스>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주제 의식을 가진 <보통 영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영화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의 상징과 은유가 있고, 오스카가 분장을 달리 할 때 마다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감독이나 연기자의 고뇌를 느꼈다면 직접적이고 피상적인 접근을 한 것일 것이다. 석가의 가르침에 따르는 사람은 윤회의 신비로움을 느낄 수도 있고, 융 학파라면 페르소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스카가 진실로 바라는 자신의 모습은 도대체 어느 것인지 관심을 가졌다면 당신은 라깡 추종자에 가깝고, 까뮈에 심취했다면 실재와 실존의 차이를 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각 단락의 안에는 또 다른 여러 가지의 풍자와 은유가 있어서 영화 전체가 가질 수 있는 해석의 여지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홀리 모터스>는 위대한 작품의 반열에 오르지 않을 수 없고, 여기에 그의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영상과 색채를 더하면 예술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굳이 비교하자면 데이비드 린치 정도인데, 레오 까라의 영화는 린치만큼 기괴하거나 그로테스크 하지 않아서 접근성은 더 뛰어나다. 열 번을 보고 스무 번을 보아도 결코 실체가 파악되지 않는 영화라고 해서 당혹스러울 필요는 없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을 수 십 번 들어도,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아름다움만 느낄 수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족이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드니 라방의 성기가 노출되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이 희미하게 처리가 되어있었다. 18세 이상의 성인 관람가로 등급을 부여하고서는 이런 식의 처리를 한다는 것은 성인 관객 모두를 어린애 취급하는 폭력이며 모독이다. 포르노가 아니라면 성기 노출은 결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필요성에 대한 감독의 결단과, 배우의 고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장면을 위해서 그들이 어느 정도의 고통과 노력을 감수해야 했는지, 우리에게 멋대로 폭력을 행사한 그 분들은 생각이나 해 보았는가. 뱀 대가리처럼 무의식 수면 위로 떠오르는 그 분들의 억압된 성욕에 대한 치기 어린 수치심을 그렇게 투사했다는 의구심을 지우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그 장면은 외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