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얼티메이텀 (Bourne Ultimatum, Paul Greengrass 2007)
훌륭한 영화가 성공한 후 만들어진 속편은 일단 점수를 깎이고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강박관념은 종종 무리수를 두게 만든다.
따라서 속편이 전편의 작품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이미 하나의 법칙처럼 되어있다. 그런데
여기 놀랍게도 속편이 나오면 나올수록 더 엄청난 힘을 가지는 괴물 같은 시리즈 영화가 있다. ‘본 얼티메이텀’은 대단했던 전편 ‘본 아이덴티티’와 ‘본 수프리머시’의 매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또 하나의 놀라운 속편이다.
1편에 ‘본 아이덴티티’는
작전에 실패 한 후 총상을 입고 바다에 표류한 후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CIA최정예 암살요원
제이슨 본(맷 데이먼 분)의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안간힘을
그렸다. 제목 그대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는 여정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2편 ‘본 수프리머시’는 CIA 내부의 음모와 비리를 덮어두기 위해 제이슨 본을 죽이려는 고위관리들을 오히려 그가 두드려 부순다는 이야기이다. ‘본 얼티메이텀’은 2편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서 목표물로 정해진 어떤 개인이든 그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시하고 제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 CIA간부 조직이 역시 제이슨 본에게 제압된다는 이야기이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각 편의 이야기 자체는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다고 느껴지지만 영화는 결코 관객을 그렇게 안이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에 있어서 ‘본 시리즈’는 지금까지의 댄디한 여러 정보기관을 소재로 한 영화들과는 차별된다. 이를테면 007시리즈를 보자. 수많은 제임스 본드 시리즈 중 어느 것을 보아도
구경거리는 넘쳐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줄거리가 생각나는 007 시리즈가 하나라도 있었던가? ‘007 두번 산다’든 ‘007 죽느냐 사느냐’든, 중요한 것은 내러티브 구조가 아니다. 흐트러짐 없이 멋진 제임스
본드, 뇌쇄적인 본드 걸, 신기한 하이 테크 무기와 아름다운
휴양지, 깔끔한 액션을 제외하면 영화는 허황된 신기루만 남는다. 아예
처음부터 내러티브나 메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영화 가 끝난 후 이야기가 기억될 필요도 없다는
것이 007시리즈의 전형적인 태도였다.
이에 비하면 이 본 시리즈는 주제의식에 충만하다. 제이슨 본은 항상 고뇌에 차 있고 때로는 처절하기까지 하다. 그는 3편을 통틀어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단지 있다면 냉철한 두뇌과
극도로 훈련된 신체가 있을 뿐. 멋진 옷도, 본드 걸도, 고성능 무기도 없을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기억마저 없으니, 우리가
생각하는 멋진 CIA요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묘하게도, 이러한 설정이 오히려 더욱 인간적인 인물을 창조했다. 사실 그는
자신이 CIA에서 훈련 받은 암살요원임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성과 도덕성을 회복해간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을 서서히 되찾고 상황을 파악하면서도 그는 도덕적으로 과거로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보통사람’인 관객의 우상이 될 수 있었다. 기억 상실은 제이슨 본에게는 악몽 같은 통과의례였지만 관객들에게는 그것이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더구나 영화의 끝은 ‘그래서 주인공은 결국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도식적인 결말을 거부한다. 영화는 끝나도 제이슨 본은 마치 우리가
그런 상황에서 당할 수 밖에 없는 것과 꼭 같이 여전히 고독하게 쫓길 뿐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본
얼티메이텀은 007 시리즈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기 보다는 아니라 격 자체가 다른 영화이다.
기억과 정체성, 개인에 대한 권력의 감시, 국가와
개인 사이의 가치관의 괴리라는 거대 담론을 차치해도 본 시리즈는 충분히 볼만한 영화이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고집으로 이루어진 현지 로케이션은 관객들에게 유럽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지러울 정도의 들고 찍기는 사실감을 극대화 시킨다. 때때로 사용되는 갑작스럽고
자유로운 줌인 또한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으며 적재적소에 위치해 있다. 편집은 완급을 적절히 조절하며
긴장감과 박진감을 최고치로 끌어낸다.
모로코 탕헤르에서의 추격 씬이 보여준 놀라운 촬영 기법, 군더더기 없고 사실적인 격투 씬, 뉴욕에서의 자동차 추격 씬, 그리고 그와 적절하게 어우러지는 음향효과의 놀라움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본
얼티메이텀의 가치는 이미 충분히 넘쳐난다. 촬영이나 편집에서의 기술적인 완성도, 이야기 구조의 탄탄함, 오락영화로서의 재미, 그리고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의 지적이라는, 영화가 이야기하고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균형 감각이 거의 완벽에 가깝다. 본 시리즈는 우리가 더 나은 4편, 5편이 기대되는 정말 희귀하고도 탁월한 영화임이 틀림없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