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7년 닥터플라자의 영화 칼럼 <시네마 파라디소>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수 많은 영화 교과서에 이미 인용되고 있는 ‘시계태엽 오렌지’는 큐브릭 감독의 탁월한 여러 개의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폭력의
부당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극단적인 폭력을 소재로 사용한 이 영화는 아직까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독창적인 표법으로 이야기한 ‘시계태엽 오렌지’는 모든 측면에 있어서 충분히 ‘역사적’인 영화이다.>
우리가 스탠리 큐브릭 감독에게 ‘천재적’이라는
표현을 고민 없이 쓸 수 있는 것은 그가 블랙 코메디부터 SF까지 한계가 없는 장르를 넘나들면서도,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시도를 끊임없이 성공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에도 가장 독특한 이미지와 사운드로 이루어진 영화가 바로 그의 1971년 작, ‘시계태엽 오렌지’일 것이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배경은 근접미래의 영국이다. 주인공 알렉스는 패거리들을
거느리고 돌아다니며 폭행, 난봉을 일삼다가 일당들에게 결국 배신을 당하며, 살인을 저지르고 체포된다.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정치인들이
시도하려는 ‘폭력성 제거’ 프로그램의 시험을 자원하고, 병원에서 시술을 받는다. 그 후 그는 폭력적, 성적 욕망을 느낄 때마다 견디기 힘든 두통과 구토를 느끼며 무기력해 진다. 지난
날 알렉스로 부터 폭행을 당한 사람들은 이를 알아채고 여러 형태의 복수를 가하며, 이를 견뎌내지 못한
알렉스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만신창이가 된 채로 누워서 다시금 정치인들의
선전수단으로 이용되게 된다.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직설적이고 명확하다. 큐브릭에게 있어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폭력적인 존재이다. 폭력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행해지는 것은 아니며,
인간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의 가학성을 제한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권력과 사회의 폭력은 또 어떤가? 그것은 인간 본성과 자유의 상실을 요구한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나
칼 레더의 ‘사형 백과’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은 폭력의 근절보다는 오히려 권력에 의한 억압으로 발생하는 대중의 폭력성을 희석하기 위한 주술로써 사용된다. 큐브릭은 이러한 철학적 주장를 냉소적인 태도로 내뱉듯이 표현한다.
하지만 그는 결코 어렵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가 흔히 영화에서 접할
수 있는 폭력적, 성적 요소로 충만하다. 알렉스는 인간이
타고난 ‘악의 성향’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된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은 어떤 인과관계나 동기부여로 설명할
수 없다. 그는 단테의 ‘신곡’에서 묘사된 ‘원죄의 환생’을
구현하고자 하는 큐브릭의 표현 의지에 의해 창조된 인물이며 극도의 악행을 저지르도록 규정된다. 놀라운
것은, 그가 행하는 폭력은 그다지 잔인하게 보이지 않으며, 성폭력
역시 선정적이지 않다. 관객이 겪는 놀라운 ‘감정의 여과’는 이미지와 음향을 모순적으로 결합시키는 큐브릭의 감각에 의하여 완성된다. 큐브릭은
이러한 효과를 위해서 아주 잘 알려진 음악들, 그것도 고전음악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음악들은 원곡이 추구하는 분위기와는 정 반대의 상황에서 사용되면서 폭력적 상황을 희화화시켜 전혀
새로운 효과를 창조한다.
패거리들이 벌이는 패싸움은 롯시니의 ‘도둑 까치 서곡’이
사용되어 폭력의 동작들은 마치 흥겨운 춤과 같이 느껴진다. 작가의 아내를 폭행하는 장면에서는 놀랍게도
‘Singing in the rain’이 사용된다. 지극히
역설적이다. 알렉스가 두 여자와 성행위를 벌이는 장면은 롯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이 저속 촬영된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된다. 기대되는
선정성을 완전히 제거해버렸다. 베토벤 9번 ‘환희의 송가’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셰헤라자드’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사용된다.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부조화의 조화’는 씬 들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었고, 이런 음악들이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목표 이상의 창조적 효과를 이루어낸다..
만약
큐브릭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영화를 만들었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듯이, 내용에 적당히 어울리는 음악을 사용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그랬다면
‘시계태엽 오렌지’는 틀림없이, 잔인하기만 하고 지극히 평범한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을 시도하고 누구보다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는 것, 이런 것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큐브릭은 ‘천재적’이다.
불행히도, ‘시계태엽 오렌지’는 한국에서 개봉된 적이 없다. 이유는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라는 이유이다. 그 대신 나는 최근 대형 할인 마트의 한 구석, 할인을 몇 번씩 해도 팔리지 않는 DVD를 산더미처럼 쌓아둔 곳에서
2500원씩에 팔리고 있는 ‘시계태엽 오렌지’를 발견했다. 무슨 문화 정책이 ‘폭력의
부당함을 이야기’하는 이 놀라운 작품을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성인들 조차 볼 수 없게 만든단 말인가? 더구나 최저가의 DVD로 할인점의 천덕꾸러기가 되게 만든 한국 관객들의 문화적 수준은 또 어떤가? 우리의 수준이 36년 전 큐브릭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큐브릭이
천재라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란 말인가? 당신은
과연 이 영화에서 무엇을 경험할 수 있을까? 우리 자신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라도, 꼭 한 번은 ‘시계장치 오렌지’를
감상해 보기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