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7년 닥터플라자의 영화 칼럼 <시네마 파라디소>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크로넨버그 감독이 다시 우리와의 게임을 신청했다. 왜 당신 내부에 들어있는 잔인한 폭력성을 부정하느냐? 내가 그것을
까발려 줄 것인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아니면 불가능할까? 선택을
강요하면서 벌어지는 게임은 결국 크로넨버그의 승리인 듯 하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그의 치밀한 화법은 비고 모텐슨의 놀라운 연기에 힘입어 크로넨버그의 말이 옳다는 것으로 결정되어 버린다. 크로넨버그는 여전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어떤 영화를 만들어왔는가를 안다면, ‘폭력의 역사’의 적어도
전반부는 충분히 실망스럽다. ‘스파이더’ 이후 크로넨버그의
에너지가 사라지고 있지않는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한다. 충격적인 상상력을 그로테스크한 장치에 실어서, 악몽
같은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하던 그의 매력적인 악취미는 온데 간데 없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의 느낌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약간의 변화를 주었을 뿐이다. 그의
표현력은 그대로 살아있고, 예리함도 여전하다. 겉으로
표출되던 에너지를 내부로 응축시킨 듯 하다.
섬뜩함과 나태함을 함께 품고있는 듯한 두 사내가 시골 모텔의 주인 가족들을 ‘아무런
이유없이’ 죽이는 롱 테이크로 시작되는 영화의 첫 씬은 충실하게 ‘크로넨버그적’이다. 이 부분은 영화 후반부의 진행방향을 어느 정도 예시하고 있지만, 이 씬이 끝나는 순간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주인공
남자 탐 스탈은 시골 마을에서 식당을 경영하며 살아가는, 아내와 두 아이를 둔 온순하고 평범한 가장이다. 마을은 평화롭고, 지루한 일상은 반복된다. 영화의 처음에 나타난 두 사내는 강도질을 목적으로 우연히 탐의 식당으로 들어온다. 악당들은 일을 치르기 위해 총을 꺼내 들었지만 순식간에 탐에 의해 사살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탐의 과거가 서서히 밝혀지게 되며, 그는 기억 속에서 지우고자 했던 과거의
자신, 즉 ‘죠이 큐색’이라는
이름의 사내와 현재의 ‘탐 스탈’이라는 두 존재 사이를 넘나들어야
하는 고통을 겪는다.
과거의 크로넨버그를 생각하면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인간의 양면성과 변신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서서 관객들에게 왜 자신의 내부에 감추어진 세계를 부정하는지를 묻는다. ‘폭력의 역사’에서 그는 신체 외부의 변형에서 내부의 변형으로 소재를
전환하였으며, 시각적인 효과보다는 잔잔하고 깊이 있는 영화적 경험을 제공한다.
그는 변신의 기준을 ‘폭력성의 유무’에
두고 있다. 주인공은 폭력으로 점철된 과거, 즉 냉혹한 킬러
‘죠이 큐색’을 기억에서 지우고 전혀 반대의 성격을 가진
인물인 ‘톰 스탈’로 변하여 살아간다.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는 ‘톰 스탈’은 과거의 ‘죠이 큐색’이
짐짓 선한 채 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과거의 킬러 죠이를 내부에서 죽였으며, 진정으로 변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죽였던 ‘죠이’를 살려내는 것은 악몽이지만,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선택의 여지는 없다. 크로넨버그는 이러한 이중적 본성을 탐과 죠이라는 한 두 인물을 통해 표현한다. 그의 주장은 어떤 인간이든 폭력적인 면과 그렇지 않은 이면을 가지고 살아가며,
때때로 그 두 가지 사이에서 방황한다는 것이다. 그는 짓궂게도 우리의 도덕성까지 조롱한다. 비정의 킬러였던 톰 스탈의 편을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폭력은
나쁘다’는 도덕적인 가치기준보다는 아마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혹은
인식하려 하지않고) 살아가는 본능적인 폭력성이 더 느껴지도록 유도하는 크로넨버그의 놀라운 설득력에 의한
것일 것이다. 폭력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인 잣대는 숨김없이 까발려지고 왜 당신의 내부에 있는 폭력성을
부정하는지, 그것을 집요하게 캐묻는다.
크로넨버그가 보여주는 폭력은 대리만족 이상의 것을 노린다. 따라서 폭력은 양적으로
반드시 보여주어야 하는 만큼 이상은 결코 보여주지 않지만, 질적으로는 유난히 뚜렷해 보인다. 평화로움과 폭력을 대비시킴으로써 충분히
폭력을 강조하며, 폭력 씬의 그 자체의 역동성은 수없이 보아도 박진감을 느낄 만큼 효과적이다. 역시 크로넨버그는 게임의 전략과 전술 어느 것 하나 허점을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미국 사회의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미국의 탄생과 서부개척시대라는 역사적 베경이 자신과 가정을 지키기 위한 폭력을 정당성화했다는 맥락에서 본다면 그것도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하다. 그 이유는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이기 때문이다. 그가 꾸준히 추구해온 것들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그런 해석은 너무나 단순해 보인다. 심지어 그 자신마저 이 영화를
‘미국 사회의 초상’이라고 하기도 했다지만, 그것마저도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과 다시 한 번 게임을 벌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크로넨버그는 끝까지 전략적으로 이중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