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S

판의 미로 (Il laberinto del Fauno, Guillermo del Toro. 2006)

조회 수 2836 추천 수 0 2014.10.07 23:22:44

 panlab.jpg


(이 글은 2006년 닥터플라자의 영화칼럼 <시네마 파라디소>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판의 미로는 결코 범상한 영화가 아니다.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소녀가 만난 판, 그가 알려준 비밀과 지하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과제들이 이루어내는 환상적인 이야기. 삶과 죽음을 넘어선 희생과 구원의 문제를 슬프고도 아름다운 동화 속에 담아낸 판의 미로는 길예르모 델 토로가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판의 미로는 현실과 환상이 서로 얽혀 있는 영화이지만 해리 포터류의 판타지물은 아니다. 전형적인 판타지 영화는 환상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지만, ‘판의 미로는 환상을 모두 제거해도 여전히 이야기가 성립 된다.

이 영화에서 판타지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관객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 존재한다. 말하자면 현실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필수이지만, 판타지는 선택이다. 판타지를 얼마나,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바로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인 것이다.

 

영화는 역사적으로 스페인 내전을, 지리적으로는 정부군과 반란군의 국지전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스페인의 어느 산 속을 배경으로 한다. 전쟁과, 그에 따른 현실에 무력하게 끌려가는 어른들이 현실적인 이야기의 축을 만든다. 반면 환상적인 이야기는 현실 세계에 내던져진 소녀 오펠리아가 읽는 동화책의 내용으로부터 시작되는 지하 세계의 공주 이야기이며, 이는 현실의 이야기와 대비되는 또 다른 이야기 축을 구성한다. ‘장르를 따지자면 판의 미로는 판타지도, 사실주의적 영화도 아닌, 2중 구조를 가지는 독특한 형태이며, 이러한 두 가지 이야기가 조화롭게 이루어내는 내러티브의 견고함이 영화의 가장 괄목할 만한 특징이다.

 

현실 세계의 이야기 구조는 그 자체로서 고전적인 패러다임을 잘 따르고 있다. 영화 첫 부분의 플래쉬 포워드를 제외하면 연대기적 서사 구조를 유지하며, 이는 관객들이 어려움 없이 이야기를 따라올 수 있게 만든다. 이러한 현실 세계 이야기는 환상 세계의 이야기와 함께 서로 독립적이지만 일치하고, 상대적이지만 조화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오펠리아가 지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이루어내야 하는 3가지 임무는 비슷한 시점에서 현실 세계에서의 사건들과 맞물려 있다. 오펠리아가 두꺼비를 찾으러 무화과 나무 속으로 들어갈 때, 무화과 나무가 상징하는 숲의 평화로움은 전쟁으로 파괴되며, 이는 나무를 죽인 두꺼비와도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아이들을 잡아먹는 귀신의 집에서 오펠리아가 먹어버린 금지된 포도는 메르세데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식량 창고를 섣불리 공격하는 반군들의 억제되지 못한 욕망과 일치한다. 마지막 임무 역시 대위가 보여주는 현실 세계에서의 욕망과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데 필요한 오펠리아의 희생의 선명한 대비로 이루어져있다. 이렇듯 두 개의 이야기는 언뜻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밀접하게 얽혀있으며, 세밀하게 다듬어진 내러티브 구조를 만들고 있다. 전체적으로 두 가지 이야기는 적절한 동기 부여, 치밀한 복선, 빈틈없는 사건의 체계화에 의해서 튼튼하게 결합되며, 대위법적인 조화를 이룬다. 이러한 요소들이 단선적인 편집에도 불구하고 결말 직전까지 갈등을 효과적으로 상승시켜 관객은 별다른 노력 없이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않게 된다

 

이야기를 구현하는 여러 가지 장치들도 튼튼하다. 오펠리아역의 이바나 바쿠에로(Ivana Baquero) 12살 소녀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분위기 있고 억제된 표정 연기를 잘 보여준다. ‘괴물 전문 역할로 이미 유명한 덕 죤스(Doug Jones) 또한 설정하기 쉽지 않은 판과 식인 괴물의 캐릭터를 잘 연기했다. 판의 걸음걸이를 나타내는 진동음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음향 효과 역시 무난하다.

 

언급한 바와 같이 전체적인 내러티브 구조에 있어서 판의 미로는 복잡하지는 않다. 이해가 어려운 부분은 없으며, 단 한번의 관람으로 모든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다. 헐리우드식 해피 엔딩을 무시하고 있지만 이 점이 관람에 무리를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메시지 전달에 있어서라면 이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스페인 내전이 배경이라고 해서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읽혀지기는 힘들다. 물론 정부군의 사령관인 비달 대위는 극우파, 파시즘, 가부장적 가치관의 상징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감독은 좌파인 반군 측에도 정의를 부여하지 않는다. 정부군이 하는 것과 똑같이 확인 사살을 하는 반군, 연인 메르세데스를 스파이로 이용하는 페드로 모두 전혀 인간적이지 않다. 정부군이 아무런 이유 없이 선량한 사람을 죽이듯이 반란군 또한 정부군을 죽이는 것이 유일한 목적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페인 내전과 정치 이데올로기는 주제의 중심이 아니라 소재에 불과하다. 현실 세계가 인간에게 가하는 잔인함, 그것에 무력하게 굴복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왜소함이 바로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더욱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한계적 존재이며, 자의든 타의든 어쩔 수 없이 다양한 형태의 구원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에 있어서 지하 세계는 죽음과 어둠의 상징이며, 판 역시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영화에서의 판은 자연을 관장하는 요정으로 소개되지만, 그의 기이한 외모와 태도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오펠리아는 평범한 인간들과는 달리 판을 믿었고,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을 희생시키기까지 한다. 믿음과 희생으로 오펠리아는 지하 세계의 공주로 돌아간 것이기도 하고, 인간으로서 현실의 고통에서 해방된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 순간, 영화는 오펠리아 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판의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당신은 오펠리아가 지하 세계의 공주라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를 둘러싼 관습과 이성을 이용하기 보다는 오펠리아의 고통과 믿음, 그리고 희생을 가슴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제대로 된 판단이 가능할 것이다. 어려워 보이지만, 길예르모 델 토로가 들려주는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를 2시간 정도만 듣는다면 결코 어렵지 만은 않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해답의 실마리는 영화의 맨 끝부분 나레이션에 있다.

 

공주가 지상에 남긴 흔적들은, 어디를 봐야 하는지 아는 자들에게만 보인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킬링 디어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2018, Yorgos Lanthimos) file

  • marcus
  • 2018-08-09
  • 조회 수 178

원더 휠 (Wonder Wheel, Woody Allen, 2017) file

  • marcus
  • 2018-07-25
  • 조회 수 202

해체된 가정, 실업자, 알콜 중독, 가정 폭력, 바람난 유부녀, 엄마와 의붓딸의 삼각관계, 조폭에게 쫓기는 딸, 방화를 일삼는 어린 아들...... 이 영화의 소재는 모두 견디기 힘든 밑바닥 삶의 질곡이면서, 삼류 막장드라마의 기본 요소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우디 앨런의 손을 거치면 천진난만한 코메...

패터슨 (Paterson, Jim Jamusch, 2016) file

  • marcus
  • 2018-07-23
  • 조회 수 276

영화가 가지는 큰 장점은 현실을 뛰어 넘는 무언가를 보여주면서 관객들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가진다. 오로지 내 주변에서 늘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현실만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뭔가 큰 이야기를 기대하는 관객들의 바램을 끝까지 모...

독전 (2018, 이해영) file

  • marcus
  • 2018-07-21
  • 조회 수 236

스틸 라이프 (still Life, 지아장커, 2006) file

  • marcus
  • 2018-07-16
  • 조회 수 190

양쯔강 쌴사댐 건설을 배경으로 도망친 아내와 딸을 찾으러 온 남자와 바람난 남편을 만나러 온 여자의 이야기. 절제된 점프 컷, 건조한 화면 속에 펼쳐지는 리얼리즘 속에 차이밍량 풍의 엉뚱한 환상이 끼어들면서 영화는 독특한 개성을 가진다. 문명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자연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디트로이트 (Detroit, 2017, Kathryn Bigelow) file

  • marcus
  • 2018-07-16
  • 조회 수 171

최초이자 유일무이하게 아카데미를 수상한 여감독, 캐드린 비글로우의 2017년 작. 1967년 디트로이트 폭동을 둘러 싼 인종갈등이 주제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를 폭력적 상황을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은 흑,백 각 인종의 문제점을 잘 나타내고 있다. 리얼리즘이 펄펄 끓어넘치는 영화이며, ...

스틸 라이프 (Still Life, Uberto Pasolini, 2014) file

  • marcus
  • 2018-02-03
  • 조회 수 203

스틸 라이프 (Still Life, Uberto Pasolini, 2014) 우리는 아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기억해내고 애도한다. 여기 모르는 사람의 죽음까지 애도하고, 그의 좋은 기억만을 보존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 조용하고 동화같은 영화는 의미 없을 듯한 죤 메이의...

자객 섭은낭 (Assassin, 허우 샤오시엔, 2015) file

  • marcus
  • 2017-11-07
  • 조회 수 232

이 영화는 무협지인 동시에 한 편의 시다. 무협지의 특징을 적절히 유지하면서, 미장센과 편집을 이용해서 예술을 만들었다. 인간의 모든 욕망과 번뇌와 초월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철학적인 영화, 아마도 역사상 유일무이한 돌연변이 무협지일 것이다. 보지 않고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사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Nader and Simin, A Separation, Jodaeiye Nader az Simin, Asghar Farhadi, 2011) file

  • marcus
  • 2017-11-07
  • 조회 수 3438

렛 미 인 (Let me in, Matt Reeves, 2010) file

  • marcus
  • 2017-10-29
  • 조회 수 232

백일염화 (Black coal, thin ice, Diao Yinan, 2014) file

  • marcus
  • 2017-10-27
  • 조회 수 219

백일염화

내일을 위한 시간 (Two days one night, Jean-Pierre Dardenne & Luc Dardenne, 2014) file

  • marcus
  • 2015-04-26
  • 조회 수 678

멜랑콜리아(Melancholia, Lars von Trier, 2011) file

  • marcus
  • 2015-01-10
  • 조회 수 1225

(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안티 크라이스트>에 이은 라스 폰 트리에의 이 영화는 형식적으로 많은 부분을 전작과 공유하고 있다. 지구로 다가오는 새로 발견된 행성 <멜랑콜리아>는 마치 두 번째 달처럼 두 개의 그림자를 만들고, 지구에 사는 생명체들에게 다양한 영향을 끼친다. 행성이 다가오든...

가장 따뜻한 색 블루 (La vie d'Adèle, Abdellatif Kechiche, 2013) file

  • marcus
  • 2015-01-10
  • 조회 수 1321

사랑을 찾고, 사랑하고, 헤어진다는 통속적인 이야기를 3시간 동안 끌고 나가서는 급기야 깐느 황금종려상까지 받았으니 케시시 감독의 능력을 출중하다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몇 가지 특별함 때문에 이 신파 멜로드라마는 이상하게도 강력한 힘을 가진다. 첫째는 동성애 이야기라는 것이다. 아직 정체성이 분...

퓨리 (Fury, David Ayer, 2014) file

  • marcus
  • 2014-12-23
  • 조회 수 1430

브래드 피트는 딱 맡아야 할 만한 역을 맡았다. 전설적인 전차장, 게다가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영웅의 이미지를 잘도 그려낸다. 진부하다. 노먼의 소녀와의 갑작스런 만남, 그리고 이어지는 폭격으로 소녀가 죽어버린다는 이야기를 믿으라고 들이미는 뻔뻔스러움이 낯간지럽다. 기동력...

인터스텔라 (Interstellar, Christopher Nolan, 2014) file

  • marcus
  • 2014-11-20
  • 조회 수 2062

헐리우드 식 결말이 아쉽지만 3시간의 러닝 타임이 지겹지 않다. 이해하기 힘든 이론물리학적 현상들을 스크린에 표현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블랙홀의 모습은 상상 밖이며, 높은 차원에서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인식시켜준다. 상대성이론도 재미있게 묘사했다. 지구 원주민 인간의 욕심과 한계에 ...

나를 찾아줘 (Gone girl, David Pincher, 2014) file

  • marcus
  • 2014-11-04
  • 조회 수 2370

<나를 찾아줘>는 겉으로는 서스펜스 드릴러지만, 속은 결혼의 정체에 대한 깔끔한 보고서다. 깔끔하다면 좀 잔인한가? 하지만 너무도 명쾌한 결론 때문에 깔끔하다는 것 이상의 아름다운 표현은 불가능하다. 이야기에 다소의 무리는 있다. 하지만 그건 소설의 문제이거니와, 직유와 과장이라는 ...

폭력의 역사 ( A history of violence, David Cronenberg, 2005) file

  • marcus
  • 2014-10-08
  • 조회 수 3283

이 글은 2007년 닥터플라자의 영화 칼럼 <시네마 파라디소>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크로넨버그 감독이 다시 우리와의 게임을 신청했다. 왜 당신 내부에 들어있는 잔인한 폭력성을 부정하느냐? 내가 그것을 까발려 줄 것인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아니면 불가능할까? 선택을 강요하면서 ...

시계태엽 오렌지(Clockwork Orange, Stanley Kubrick, 1971) file

  • marcus
  • 2014-10-08
  • 조회 수 3113

이 글은 2007년 닥터플라자의 영화 칼럼 <시네마 파라디소>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수 많은 영화 교과서에 이미 인용되고 있는 ‘시계태엽 오렌지’는 큐브릭 감독의 탁월한 여러 개의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폭력의 부당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극단적인 폭력을 소재로 사용한 이 영화는 아직...

판의 미로 (Il laberinto del Fauno, Guillermo del Toro. 2006) file

  • marcus
  • 2014-10-07
  • 조회 수 2836

(이 글은 2006년 닥터플라자의 영화칼럼 <시네마 파라디소>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판의 미로’는 결코 범상한 영화가 아니다.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소녀가 만난 판, 그가 알려준 비밀과 지하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과제들이 이루어내는 환상적인 이야기. 삶과 죽음을 넘어선 희생과 구원의 문제...

XE Login